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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일본의 로켓왕 우에마쓰 쓰토무를 만나다


▲ 민간인으로서 드물게 우주개발에 뛰어든 우에마쓰씨가 자신이 개발한 로켓 옆에 서있다.

NASA도 놀란 홋카이도 시골 마을의 로켓 공장

<이 기사는 주간조선 2114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나는 일본 북쪽 섬 홋카이도(北海道)의 작은 도시 아카비라(赤平)에 산다. 이름은 우에마쓰 쓰토무(植松 努). 1966년생, 마흔 넷이다. 직업은 엔지니어이자 경영인. 아버지가 세운 회사 우에마쓰전기(植松電氣)의 전무이자, 카무이 스페이스 웍스(CSW)라는 우주개발회사의 대표이사다. 
   
   ‘카무이 스페이스 웍스’라는 회사 이름에서 알아차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홋카이도의 시골동네에서 우주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일본에서 꽤 유명하다. 아니 미국에도 우리 회사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나는 우주개발은 정부가 하는 일이고 개인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세인의 상식을 깨고 있다. 로켓을 개발하고, 지구 궤도를 도는 초소형 인공위성을 만들며, 지구상에 세 개밖에 없는 마이크로 무중력실험탑을 갖고 있다. 민간인으로 이런 우주개발에 뛰어든 사람은 지구상에서 보기 힘들 것이다. 우주개발 사업을 한다고 하니, 거대 기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에마쓰전기는 직원이 20명밖에 안되는 작은 회사이다. 동네 철공소보다 약간 큰 정도다. 
   
   
   “넌 머리가 나빠! 무슨 우주 타령이냐”
   
   나는 2005년 로켓 개발에 나서 많은 엔진 연소 실험과 발사 실험 끝에 지구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로켓 ‘카무이’를 개발했다. 지금까지 로켓 발사 실험만 50번 정도 했다. 올해도 9월과 12월에 작고, 큰 실험이 각각 잡혀 있다. 최신 로켓 모델은 전장 9m이고 추진력은 1000kgf이다. 이 정도 추진력이면 고도 100㎞까지 올라간다. 지상 100㎞면 우주다. 
   
   우주개발로 돈 벌 생각도 없다. 이건 내 어렸을 때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일본 사회에 만연한 ‘어차피 무리야(どうせ無理)’라는 체념, 포기를 부추기는 문제를 바로잡겠다는 나의 도전이기도 하다. 나의 진짜 직업이 우주개발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어렸을 때 꿈이 뭐냐고 어른들이 묻곤 했다. 나는 “로켓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어른들은 “우와, 우주여행이라니! 참 멋진 꿈이구나”라는 말을 해줬다. 조금 자라 중학생 때도 어른들이 꿈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변함없이 “로켓을 타고 우주여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른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넌 아직도 우주 타령이냐. 우주는 아무나 가는 데가 아니야. 이제 어느 대학에 가고 어떤 회사에 취직할지 생각해봐라”라고 책망했다. 
   
   고향인 아시베쓰(芦別)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진로 상담을 하는데 담임 선생님에게 비행기나 로켓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너는 머리가 나쁘다. 아시베쓰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할 실력이 안된다. 비행기나 로켓 만드는 것은 무리다.” 선생님은 이렇게도 말했다. “비행기나 로켓을 만들려면 도쿄대를 가야하지만 아시베쓰에서는 도쿄대에 간 사람이 지금까지 없다. 그래서 안 된다. 네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무리다.” 나 역시 한때는 도쿄대에 가야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하니 1903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력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로 띄운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도쿄대는커녕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도쿄대와 로켓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앞으로 혼자서 비행기에 대해 계속 공부하기로 했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이 보는 비행기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꿈은 꿈이 아니다”
   
   
▲ 우에마쓰전기 공장 전경

 

하여간 학교 선생님들은 내게 도움이 안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든 졸업문집에는 ‘나의 꿈’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직접 만든 잠수함을 타고 세계의 바다를 여행하고 싶다고 썼다. 그날 선생님에게 불려가 야단맞았다. “다른 아이들은 제대로 된 직업을 쓰는데 너는 왜 이런 걸 쓰니? 이런 당치도 않고 이뤄질 것 같지도 않은 꿈을 써서 어쩌자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꿈을 쓰라고 해서 내 꿈을 썼을 뿐인데 왜 혼나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종이 공작에 빠져 반 친구들 사이에서 종이비행기 박사로 통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내 몸 크기의 종이비행기를 만든 적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인데 종이 공작 하는 걸 본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는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다. “네가 그런 짓을 하니까 성적이 나쁜 거란다.” 로켓을 만드는 지금, 나는 그 선생님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어차피 안돼”라고 말하던 그분들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여줬다고 생각한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 57m 높이의 마이크로 무중력 실험탑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던 나는 일본 내 공립공업대학 중 입학 커트라인이 가장 낮은 홋카이도의 기타미(北見)공대에 들어갔다. 1989년 대학 졸업 뒤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항공우주 부문에서 비행기 만드는 일을 했다. 공부도 못했는데 미쓰비시중공업에 어떻게 들어갔느냐고? 미쓰비시중공업의 자회사인 인력파견회사 료유계산(菱友計算)에 들어갔는데 그 회사가 나를 미쓰비시중공업에 파견했다. 내가 일하던 항공우주통괄부는 2차대전 당시 명성이 높았던 함상전투기 ‘제로’를 만든 곳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을 5년6개월 뒤에 떠났다. 이유는 그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 팀은 공력 설계라는 비행기의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을 담당했는데 수백 명 중 비행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단 한 사람의 동료뿐이었다. 그들은 비행장에 가도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1994년 5월 퇴사하고 홋카이도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우에마쓰전기의 직원은 아버지와 나 단둘이었다. 회사라기 보다는 아버지가 혼자 꾸려가는 동네 수리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상태였다. 2000년 7월까지 나는 자동차 아래에 기어들어가 배선을 고치거나 배터리를 교체하는 일을 했다. 불경기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아버지와 나는 재활용품 분류 공장에서 사용하는 파워 쇼벨(Power Shovel) 끝에 매다는 전자석을 만들기로 하고 업종을 변경했다. 길거리에서 보는 파워 쇼벨은 대부분 도로 바닥에 구멍을 내는 데 사용한다. 오늘날 우에마쓰전기의 주력 제품은 이 전원 내장형 전자석이다. 일본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전원 내장형 전자석은 재활용품업체 작업장에서 폐철 조각들을 분리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을 때 사용한다. 아버지가 1972년에 처음 제품을 내놓은 것인데, 당시는 몇 년에 한 대 정도 생산하는 식이었다. 고장이 많았다. 내가 합류한 뒤 고장 원인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재밌었다. 왜 고장이 났는지 이유를 찾아갔다. 탐정가 셜록 홈스가 된 느낌이었다. 2000년 8월 주식회사를 만들고 아시베쓰의 공장을 현재의 아카비라 공단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때 회사 경영이 매우 힘들었다. 1년에 200일 정도는 혼슈(本州·일본 본토)에 가서 일했기 때문에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자금 결제도 안됐다. 비행기를 타면 이 비행기가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기업에 사기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 많았다. 일본에도 사기꾼이 많다. 결국 없는 시장을 만들어가며 전자석 사업이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우주개발 사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 수 있었다. 
   
   
   실패, 실패… 실패를 통해 배우다
   

▲ 우에마쓰씨(오른쪽)와 그의 파트너 나가타 홋카이도대학 교수

우주개발 일은 2004년 6월 홋카이도대학 공학부 우주환경대학원의 나가타 하루노리(永田 晴紀) 교수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계기가 됐다. 그는 “폭발하지 않는 로켓 엔진을 만들고 있는데, 실험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에마쓰전기의 공장 용지를 빌려줄 수 있느냐”고 했다. 폭발하지 않는 로켓을 만들 수 있다니, 나는 믿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좋다고 했다. 
   
   나가타 교수는 기존 로켓과는 달리 플라스틱 제품의 소재인 폴리에틸렌을 연료로 사용한다. 보통의 경우 기체가 파손되면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 연료에 불이 붙어 대폭발을 일으킨다. 매우 위험하다. 반면 플라스틱 고체인 폴리에틸렌은 좀처럼 타지 않아 폭발 위험이 없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나가타 교수는 폴리에틸렌을 급속도로 태우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에게 실험을 언제 시작하는지 물었더니 예산이 없어서 아직 모른다고 했다. 로켓 엔진 한 개 만드는 데 1000만원이 드는데, 1년에 하나밖에 만들 수 없는 비용이라고 했다. 엔진이 부서지면 논문을 쓸 수 없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실험은 엔진이 부서지지 않는 실험에 한정되어 있다고도 했다. 나는 우에마쓰전기가 경비를 모두 대겠으니 로켓 엔진 개발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만일 나가타 교수에게 당시 돈이 충분히 있었다면 나는 단순히 로켓 엔진 연소 실험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2005년부터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공장에서 엔진 연소 실험을 하는데 여섯 번이나 엔진이 폭발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계속 실패하니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나와 우리 회사 직원들, 홋카이도대학의 학생들은 아주 소중한 걸 배웠다. 성공의 비결이다. 성공하려면 성공할 때까지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 정도의 폴리에틸렌을 태워서 2만5000마력을 내는 기술을 개발했다. 발사 가능한 로켓 엔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엔진 제작 비용도 크게 줄였다. 나가타 교수의 로켓은 대부분의 부품을 특별 주문해 만든 탓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설계를 조금씩 바꾸니 규격 부품 사용이 가능해졌고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비용도 많이 줄어 10만원 정도의 재료로 실험 로켓의 엔진을 제작하게 됐다. 철 대신 알루미늄을 사용해 경량화에 성공했다. 많은 엔진 연소 실험 뒤 로켓 기체에 합해 하늘로 쏘는 비행 시험 단계로 넘어갔다. 기체는 동네 공구 백화점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를 사용하고 있다. 
   
   로켓 엔진의 성능 개량도 계속 이어졌다. 맨 처음에는 미니 로켓으로 시작했으나 ‘카무이-90’ ‘카무이-250’ ‘카무이-400’ ‘카무이-1000’으로 추진력이 향상됐다. 카무이는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 언어로 ‘신(神)’이란 뜻이고, 모델 뒤의 숫자 90, 250, 400, 1000은 엔진 추진력(kgf)을 가리킨다. 로켓 길이를 보면 처음에는 2m였으나 3m, 5m, 그리고 카무이 1000모델은 9m가 됐다. 일본이 1964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의 로켓 전장이 15m였다. 우리 로켓 성능이 어느 정도에 이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JAXA의 실험로켓으로 선정 
   
   2005년 첫해에는 발사 실험에 실패해 한 기를 쏘아올리기도 힘들었으나 2006년에는 두 번, 2007년에는 세 번, 2008년에는 17번, 2009년에는 10번 발사 실험을 했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발사 후 로켓이 똑바로 올라갔다. 그 전까지는 비틀비틀 날아갔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환성을 터뜨렸다. 그해 8월 4일 5m 길이의 로켓을 쏘아올리는데 음속을 돌파했다. 로켓이 구름을 뚫고 사라지자마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빵! 빵! 음속을 돌파하는 소리를 들을 때의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로켓은 고도 3500m까지 도달했다. 후지산 정상과 맞먹는 높이다. 로켓은 안정성을 인정받았고, 일본 정부의 우주개발기구인 JAXA(일본우주항공개발연구기구)의 실험 로켓으로 지난해 선정됐다. 미국의 우주선 개발 기업인 로켓플레인(Rocketplane)과 공동으로 차세대 스페이스 셔틀을 연구할 정도로 발전했다.
   
   로켓 발사는 공장에서 하지 않는다. 2005년 발사에 실패했을 때와 2006년 두 차례 미니 로켓을 쏘아올렸을 때는 공장에서 했다. 처음 발사 실험을 했을 때는 굉음으로 동네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 일본은 또 250m 이상 높이로는 동네에서 발사할 수 없다. 250m 이상 로켓을 쏘아올리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안전을 위해 인가가 드문 지역에 가야 한다. 그래서 공장이 있는 아카비라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키초(大樹町)의 개인 목장을 빌려서 한다. 이곳에서 쏠 수 있는 최고 고도는 1㎞이다. 바다를 향해 쏘면 1만m까지 쏠 수 있다.
   
   로켓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삿포로경찰청 공안계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테러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2006년에는 삿포로 기업 전시회가 있었는데 경찰기동대가 몰려와 전시 로켓을 압수해갔다. 누군가 훔쳐가면 테러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2008년 홋카이도의 도야호(洞爺湖)에서 G8정상회담이 열렸는데 당국은 우리에게 로켓 발사를 자제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2006년 초소형 인공위성 발사 성공
   

▲ 그간 개발한 로켓들 일부

우리가 만든 이 작은 로켓은 뜻밖에 쓸모가 있다. 지구 궤도에는 약 2만개의 우주쓰레기가 있다. 인공위성의 잔해나 우주선 파편이다. 얼마 전에는 휴대전화 통신용 인공위성이 폐기된 러시아 인공위성과 충돌해 부서지는 사고도 있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충돌 위험이 있어 우주비행사 전원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주 쓰레기가 더 늘어나면 우주를 이용할 수 없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 
   
   우주쓰레기는 음속 25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다니는데 이를 잡으려면 그 뒤를 쫓아야 한다. 추적한 뒤 그물이든 뭐든 도구를 이용해 제동을 걸어야 한다. 멈춘 쓰레기는 지구 인력에 끌려 떨어지다 지구 상공에서 불타 사라질 것이다. 우주쓰레기를 처리하려면 값싸고 작은 로켓이 다량 필요하다. 쓰레기 하나에 한 발의 로켓이 필요하므로 약 2만개의 로켓이 필요하다. 그 용도에 적합한 로켓이 바로 우에마쓰전기가 개발 중인 로켓이다. 쓰레기를 쫓아가기만 해서는 안되며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인공위성 개발에 착수했다. 홋카이도 공대의 사토리 신 교수가 도와줬다. 디자인은 사토리 교수가 하고, 제작과 실험은 우리가 했다. 2006년에 초소형 인공위성 HIT-SAT를 발사했다. HIT-SAT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0㎝ 크기다. 당시 우리가 만드는 카무이 로켓은 성능이 그렇게 안 됐으므로 일본 정부가 개발한 M-V로켓(3단계 고체 연료 로켓)에 실어 우주로 쏘아올렸다. 가고시마(鹿兒島)현 우치노우라(內之浦) 우주공간관측소에서 발사했다. 우리가 쏘아올린 인공위성은 우주에서 아무 탈 없이 1년9개월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HIT-SAT가 보내온 전파는 회사 건물 옥상에 설치한 안테나로 수신했다. HIT-SAT에는 지구 귀환 기능을 넣어두었다. 실험이 종료된 뒤 지구로 돌아와 우주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 됐다. 
   
   
   세계서 단 3개, 무중력실험장치 건설
   

▲ 2006년 지구궤도에 올린 인공위성

우주개발이 본 궤도에 오르자 나는 2006년 12월 카무이 스페이스 웍스(CSW)를 설립했다. CSW는 우에마쓰전기가 하는 우주개발 부문을 담당하는 것이다. 말이 별도의 회사이지 일은 우에마쓰전기의 직원 20명이 한다. 
   
   우리 회사에는 지구상에 세 개밖에 없는 무중력실험장치도 있다. 나머지 두 곳은 독일과, 일본의 기후(岐阜)현에 있다. 무중력실험장치는 로켓 연료 연소를 연구하는 데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료가 우주 공간에서 잘 타는지 확인하는 데 사용된다. 무중력 실험 장치 건설은 단순해 보이지만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무중력 실험탑 위에서 무게 500㎏인 캡슐을 떨어뜨린다. 캡슐은 시속 100㎞ 속도로 50m 높이에서 떨어진다. 캡슐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 속도를 순식간에 0으로 만드는데 이때 무중력 상태가 된다. 충돌이나 마찬가지인 충격이 더해지는데 캡슐 속에 달걀을 넣어서 달걀이 깨지면 안된다. 
   
   내가 직접 만들어보니 역시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에 딱 두 개밖에 없어 시공 경험이 있는 업자를 찾는 데 애를 먹었고, 업자를 찾아낸 뒤에 그들이 제시한 비용이 3억엔이라는 거금이어서 놀랐다. 결국 직접 설계도를 만들어 최소 비용으로 만들기로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해냈다. 캡슐도 직접 제작했다. 시공사가 제시한 돈의 10분의 1인 3000만엔으로 만들었다. 기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하는 우에마쓰전기
   

▲ 우에마쓰전기의 공장 내부

여러분도 무모한 일에 한번쯤 도전해 보기 바란다. 어려움에 부딪히면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도전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독일의 무중력 실험 시설은 5초 동안 무중력을 유지한다. 이용 비용은 약 1500만원이다. 4초 동안 무중력 상태를 유지하는 기후현의 시설 역시 1000만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한다. 우리 시설은 3초 동안 무중력을 유지하지만 공짜다. 2005년 6월 시설을 만든 뒤 다음해인 2006년 우리 회사에서 실시된 무중력 실험은 350회나 된다. 주변의 대학생은 물론, 한국이나 프랑스에서 로켓을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실험하러 찾아온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직원까지 방문할 정도다. 우리 직원들은 그들이 만든 캡슐 실험 장치를 직접 보고 그들을 도와주며 고장이 나면 고쳐준다. 그러는 사이 무중력 실험장치를 만드는 노하우가 축적되었다. 전세계 연구자들과 친분도 쌓았다. 원금은 어떻게 회수하느냐고 주변에서 묻는다. 로켓 개발 노하우와 인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직원이 몇 명밖에 안되는 작은 공장이지만 화학 연료를 쓰지 않은 로켓으로 언젠가 꼭 우주를 여행하겠다는 기개만큼은 NASA보다 더 우주에 가깝다고 자신한다. 
   
   우주개발을 한다니 우에마쓰전기의 직원이 대단한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직원은 거의 없다. 모두 똑같이 재활용품업장용 전자석 사업을 하면서 우주개발을 한다.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아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아이가 모여 우주개발을 한다. 정부나 연구기관 사람들이 종종 회사를 찾아 우주개발에 관한 회의를 하기도 하지만 대화 도중 수준이 맞지 않거나 안 통하는 일은 없다. 직원들이 로켓을 좋아하게 되고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기까지는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로켓을 쏘아올리자 ‘우에마쓰 전무가 해낸 걸 보니 대단한 일도 아니구나, 나도 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하나둘 뛰어들었다. 회사 경영 방침은 ‘가능한 가동률은 낮추고, 되도록 팔지 않고, 만들지 않는다’이다. 우리는 시장에 고장이 나지 않는 전자석 제품을 판다. 그러니 누가 이 시장에 뛰어들겠는가? 고장이 나야 시장이 커지고 경쟁자가 생기는데 고장이 나지 않으니 신규 진입자가 없다. 가동률과 불량률을 낮춰 얻은 시간은 새로운 제품의 발명이나 특허에 쓰고 있다. 
   
   ‘넌 안돼!’가 아닌 도전을 가르치는 학교 
   
   나는 “어차피 안돼!”란 말을 일본 땅에서 없애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공장 옆의 공단 내 팔리지 않는 땅 13만㎡를 사들였다. 이곳에서 나는 제도권 학교교육이 만드는 잘못된 가치관을 부수기 위한 학교를 지었다. 시설은 2009년 8월에 일단 완공됐다. 건물 세 동이다. 하나는 강의와 실습 공간, 한 건물은 숙소, 한 건물은 연수 및 회의실이다. 이곳에서 어른들에게 부여할 과제는 생활비를 10분의 1로 줄이고, 식비를 절반으로, 학교 수업료는 0으로 없애는 일이다. 가계 대출과 아이들 학비 부담에서 해방되기만 해도 사람들은 즐겁게 살 수 있다. 건설비가 기존 주택의 10%밖에 안 드는 집을 지을 것이며, 새로운 교통수단도 개발하려고 한다. 도로도 자동차도 개선할 점이 많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36억원을 차입했다. 36억원을 몽땅 날린다 해도 그곳에서 성장할 아이들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다. 낙제의 왕으로 불리던 나도 지금까지 2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으니 말이다. 이 목표는 언제 달성될지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보고 있다. 내가 못하면 내 아이들이, 아니면 우리 공장을 찾아와 내 말을 듣고 영감을 받은 어린 학생들이 커서 이어갈 수도 있다.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은 꿈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목표일 뿐이다. 그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결정한다. 나는 우에마쓰전기에 견학 오는 학생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꿈을 꾸라고 말한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이뤄지는 신화는 어디에도 없다. 실패를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 
   
   로켓 말고 잠수함도 만들어 보려고 한다. 로켓을 만드는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 일본 전역의 바다가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가 자주 들려온다. 바닷가 연안에서 해초를 비롯한 생물들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면 수중 작업이 가능한 소형 잠수정이 필요한데 일본에는 아직 없다. 만들어보겠느냐는 제안도 들어왔다. 파도가 강한 곳에서 사용해야 하니 바닷속에 떠다녀서는 안되고, 꽃게처럼 다리가 달려서 바다 밑을 기어다니는 장치를 구상 중이다.
   

나는 행복하다. 일본에서 유명해진 지 3년 됐다. 지난해 6월 ‘나사보다 우주에 가까운 동네 공장’이라는 책도 냈다. 강연 다니기도 바쁘다. 오라는 곳이 너무 많다. ‘일본을 대표하는 불굴의 리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00인 속에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 도요타자동차의 와타나베 가쓰아키 사장도 있다. 내 책이 이웃 나라 한국에서도 최근 출판됐다. 얼마전 한국에서 주간조선 기자가 취재를 위해 방문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 찾아온다고 했다. 한국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바쁘지만 시간을 내기로 했다. 며칠 지나자 그가 찾아왔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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