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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or: 손정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1.

2012/01/11 00:00

Mentor들의 철학, 인생을 살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앞으로 스크랩 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은 중앙일보의 기사임.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돼지 치는 집 아이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제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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